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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의사의 건강이야기/소아과 일반 상식

<양육가설> - 부모는 정말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 주디스 리치 해리스 저)

 

오랜만의 글입니다.
출산을 하면서 육아에 대한 고민이 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책을 여러 가지 읽고 아내랑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부모가 얼마나 해줄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최근 한국의 분위기는 부모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고통받거나,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육아가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많은 것들이 부모의 책임으로 여겨지면서 더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자라나면서 부모님의 양육을 받았고, 감사하면서도 부족한 면에 대해서는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부 어릴 때 이야기이지만요. 지금은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부모가 잘못해서 아이가 삐뚤어지거나 대학을 잘 못가는 것일까요?

좀 더 질문을 완화시킵시다. 

 

부모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아이가 삐뚤어지거나 대학을 못가는 것일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양육가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선 아이가 다른 애들보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는 것, 즉 표현형의 차이의 약 절반 정도가 유전자에 의해 설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조금 조심스러운데, IQ가 높은 것이랑 다른 애들에 비해  IQ가 높은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유전자 때문에  머리가 좋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

 

내 아이가 IQ  가 평균보다 10점이 높은 것의 절반정도가 유전자로 설명이 되는 것이죠. 

내가 나쁜 유전자 물려준 것도 부모의 잘못이라면.. 너무 슬프네요. 

 

이런 유전자에 의한 영향을 제외한 나머지 절반 정도는 그럼 부모의 양육에 의한 것일까요?

 

'양육 가설'의 핵심이 바로 부모의 양육은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영향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 폭력과 같은 심각한 학대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범주에 해당되는 양육은 아이에게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놀랐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부모가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니.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면서 결국에는 내가 십수 년간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증거로 여러 개를 제시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보면 

1. 문화의 영향력이 가장 온전히 드러나는 언어의 경우, 이민자 부모의 아이들은 현지 말을 쓴다. 

 언어라는 것은 유전의 영향을 거의 배제할 수 있는 표현형으로, 온전히 문화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 부모의 자녀들을 보면, 그들은 한국말을 대체로 잘 못하고 영어를 쓰며 미국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가정의 2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부모의 언어를 간직하는 경우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미국 현지인들과 교류가 없을 때뿐입니다. 

 

부모의 영향력이 크다면, 부모들이 모국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따라야할텐데, 십중팔구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는 부모의 언어를 쓸지언정 밖에서는 완전히 현지의 언어만 사용합니다. 그리고 정체성도 현지인들을 따라갑니다. 

 

2.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들도 성격이 모두 다르고, 그 유사성은 공통 유전자에 의해 거의 다 설명될 수 있다. 

부모님이 형제들을 보면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죠.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자신들의 형제를 보면 본인과 확실히 다릅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양육을 받았는데 왜 다를까요?

 

유전자가 달라서겠지만,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유전을 제외하면 형제들의 성격 사이에 유사성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 사이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일란성쌍둥이는 유전자, 부모, 환경이 같음에도 쌍둥이들 간의 성격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양육이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면, 쌍둥이들은 데칼코마니 같이 같아야 할 텐데 말이죠. 

 

3. 입양된 자녀들과 생물학적인 자녀들을 비교해보면, 어린시절에는 IQ가 비슷하다가 성인이 되면 유사성이 전혀 없어진다. 

 

양육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부유한 가정으로 입양되어 좋은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생물학적인 자녀들과 IQ가 비슷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즉 입양 초기에는 상관관계가 보이다가 점점 없어지고, 성인이 되었을 때는 거의 0에 수렴합니다. 

 

4. 어렸을 때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일란성쌍둥이의 성격은 같은 가정에서 자란 일란성쌍둥이의 성격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양육이 중요하다면, 다른 가정으로 가서 다른 교육을 받으면 분명히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

 

그런데 같은 집에서 자라나, 다른 집에서 자라나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면 비슷한 성향을 갖는다고 합니다. 

 

위의 예들 외에도 수십 가지가 나오는데 다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바로 집단 사회화 이론입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또래 집단을 통해서 성격이 형성되고 사회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이죠.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부모 행동을 따라 해서가 아니고 부모의 유전자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자기들 또래 집단에서 또래나 조금 위의 아이들은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한 것이 있는 게, 아이가 집단에서 하는 행동이나 그 집단에서의 서열도 유전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유전자의 영향이 굉장히 크겠죠. 그런데도 집단에서 받는 영향은 엄청 크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자신들을 철저히 구분한다고 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어른들의 행동이나 문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당연히 한국 어른들의 문화를 차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에게 맞는 것은 받아들이고,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고 자기 또래 집단에 맞는 것들을 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크리올 어가 있습니다. 

 

자메이카 등지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모아 놓으면 자기들끼리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고 합니다. 물론 그 바탕은 각자의 모국어이지만, 결과물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입니다. 

 

이러한 크리올어는 부모들에게서는 절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롤모델은 절대 어른이 아니고, 자기 또래 집단에서 조금 더 성숙한 아이이거나, 조금 손위의 아이라고 합니다. 

부모도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어른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단, 부모의 가르침과 자기 또래 집단에서 필요한 것이 일치할 때만 받아들입니다. 

아니면 부모 앞에서만 부모의 가르침에 따르고, 집 밖에서는 자기 맘대로 합니다. 

 

집과 밖에서의 행동은 어느 정도 같은 맥락을 따릅니다. 유전자는 같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의 부모들을 봅시다. 

부모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이다. 

 

부모들 앞에서는 얌전한 아이도 밖에서는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나는 아이에게 잘해줄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여기에 대한 답도 해줍니다. 

 

우선 부모가 아이를 괴롭히면 부모-아이 관계는 나빠집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가족 관계가 깨지고, 아이가 집에 있을 때 불행해지겠죠. 

 

정도가 심각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 불행이 평생 지속되거나 집 밖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삶은 힘들겠죠. 

 

그래서 당연히 아이에게는 잘해줘야 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이 책에서 경계하는 것은 아이가 잘못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가 자신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육 가설의 미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집단 사회화를 돕기 위해서 적절한 또래 집단을 선정해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를 좋은 학군의 학교에 보내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집단은 좋은 학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교육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따돌림당하거나 괴롭힘 당할 수 있죠. 

 

그다음으로는 아이가 집단 내에서 서열이 너무 낮아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집단 내에서 아이가 서열이 낮아지면 괴롭힘을 당하고, 아이의 성격에 장기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 조금 이상할 수는 있겠죠. 집에서 괴롭힘 당하는데 밖에서는 멀쩡할 수가 있다? 이 문제는 조금 어려운데, 저자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합니다. 집에서는 계모와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밖에서는 왕자님과 어울리고, 성격에도 결함이 없는 아이. 신데렐라는 엄마에게서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집 안에서의 괴롭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슬픈 이야기인데, 집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는 미움받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이는 또래 집단에서도 동일하기 때문에 역시나 또래들에게도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부모가 아이의 서열을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죠. 

 

집단에서 서열이 낮아지는 경우는 남들과 다를 때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가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치아 교정을 받게 하고, 피부 관리를 해주고, 옷을 깨끗이 해주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도와주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부모가 크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네요. 

아 한 가지 더 있군요. 좋은 유전자를 주기.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 내가 조금 잘못해도 아이는 잘 자라겠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좋은 유전자를 주지 못한다면, 아이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내가 부유하지 않으면 좋은 학군이나 좋은 옷을 사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금수저를 주지 못해 미안하다...

 

긴 글이 되었는데, 육아하는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